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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4월 24일 3학년 공공주거 프로젝트 회의 복기&나아가야 할 방향설계 2022. 4. 25. 16:15728x90
3학년 기말 프로젝트는 공공주거다.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트리엔날레 덕분에 3인 1조의 팀으로 움직이게 되었으며 팀을 구성하는 것보다 순탄치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팀플이라 함은 누군가는 짊어져야 하는 일이 생기고, 누군가는 포기해야 할 일도 생기고, 누군가는 마이웨이를 가는 등 총체적 난국일 것이다.
그 전에도 많은 회의를 했지만, 오늘 알바가기 전 회의를 한 결과, 이쯤에서 생각을 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글을 쓴다. 본의 아니게 설계 할때마다 팀장 역할을 맡아 왔지만, 오늘만큼 팀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게 힘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동안의 설계 팀플은 설계실에서 항상 살았던 탓일까, 아님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던 탓일까, 회의가 찝찝하게 끝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팀플은 뭐랄까, 항상 회의의 끝이 '이렇게 끝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야 많겠지만 그중에는 서로 간의 생각이 너무 많아서, 서로 간을 잘 알지 못해서,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해서가 있을 것이다.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서로 잘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개개인의 특성을 잘 알아야 조율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노력중이다. 팀원들이 알랑가 모르겠지만^______^) 개개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맨 처음 생각해낸 것은 '관음증'이었다. 다소 적나라한 키워드이지만 주거공간에서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관음증적 욕망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지하철에서 남의 핸드폰을 쳐다본다던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던지 등의 엿보기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음증적 욕망이 주거에서는 어떻게 발현되어있냐라고 했을 때, 펜트하우스와 반지하의 선호도 차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펜트하우스는 맨 윗층에서 자신을 감추고 아래의 사람들을 관음할 수 있는 장소다. 반지하는 자신을 감추지 못한 채 지상의 사람들 누구에게나로부터 관음당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는 주거의 층별 위계질서를 만들어냈으며 부동산 가격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회의 편협적인 시각을 만들었다.
공공주거에서 이러한 문제를 관음증적 욕망을 이용하여 해결한다면 꽤 재밌는 프로젝트가 될 것 같았다. 가령, 상층부와 하층부의 위계질서를 없앨 수 있는 건축적 언어라던가, 시선의 놀이를 통해 다양한 장면들을 생성해낼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크리틱 당시, 우리의 이번 주제는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의견이 있었고, 이러한 생각들은 잠시 멈추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생각으로부터 다시 시작했다. 다소 어려운 주제였지만, 팀원들 모두 적극적인 참여해주어서 나름 괜찮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본래적 세상에서 살아가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 갖혀 이러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상은 비본래적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본래적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그 과정은 일련의 네가지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첫번째, 객관화.
객관화라는 말은 우리가 새롭게 정의를 내린 말이다.
객관화는 "일상적 행위 속에서 그 행위를 비일상적 행위로 다시 바라보는 것" 이다.
이러한 것은 피터줌토르의 파빌리온에서 잘 드러난다. 런던의 바쁜 일상 속에서 자연은 본래적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일상 속에 은폐된 자연의 본래적 모습을 다시 이끌어내기 위해서 줌토르는 휴식이라는 일상적 행위 속에서 자연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정원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정원은 갤러리의 정원 안에 휴식을 위한 새로운 정원으로서의 '정원 안의 정원'으로 마련된다. 정원 안의 정원은 자연을 대상화하여 비일상적인 것으로 변모된다.
두번째, 차이를 인식.
객관화를 하고 난 뒤, 우리는 비로소 본래적 삶과 비본래적 삶의 차이,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세번째, 존재를 자각-존재의 실현.
차이를 인식한 뒤에는, 나라는 존재를 자각하게 되고 이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주거에서 존재를 실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시가 '정연두-상록주택'이 있다. 건축가는 a라는 똑같은 공간을 제공했는데, 거주자들은 b,c,d,e 등의 수많은 거주 환경을 보여주었다. 즉,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은 거주자의 몫이고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존재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변성'을 키워드로 거주자에게 가구로만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닌 여러 건축적 방법으로 자유도를 주고자 했다.
하지만, 너무 1차원적인 생각이었을까. 다른 조와 99퍼센트 일치하는 컨셉이었고 우리의 생각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다른 조 팀원과 우리 팀원이 룸메였는데 발표날 알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본 것이 우리가 재정의를 내렸던 '객관화'에 포인트를 맞추었다.
존재의 실현을 위해서는 객관화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주거환경에서 어떻게 객관화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이와 더불어 맨 처음에 생각했던 관음증도 하이데거와 엮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고민한 결과, 관음증적 욕망을 표출하는 행위(엿보기 행위)자체가 객관화를 하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스쳐가는 일상이지만 무언가를 몰래 쳐다보고자 하는 것은 일상적 행위 속에서 그 행위를 비일상적 행위로 인식하는 것과 동일맥락으로 보였다.
추가로, 객관화가 가장 필요한 존재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았는데, 독거노인이 떠올랐다. 누구보다도 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만 혼자서의 힘으로는 객관화를 이룰 수 없는 존재.
또한, 이전의 컨셉에서 아쉬웠던 점은 사이트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었다. 사이트 인근 조사결과 60대 이상의 사람들의 비율이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의 비율보다 높았고, 북서쪽으로는 홍제천과 함께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경의선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의 사이트는 이 두 길이 교차하는 지역이었고, 이를 이용하여 공공주거에 사람들을 유입시켜 커뮤니티의 장이 되고 이를 독거노인이 관음증적 욕망을 표출하거나 직접 참여하여 객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여태 나온 의견들을 종합하여 결론내린 나의 생각이다. 팀원들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장에 말했듯, 누군가는 짊어져야 하고, 누군가는 포기해야 하고, 누군가는 마이웨이를 가야한다. 팀원들과 더 친해져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설계든, 고민거리든. 우리팀 화이팅^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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